2018. 8. 29 11:57AM

정림학생건축상 2018 시나리오 총평, 심사위원 김영민


시나리오 총평 (김영민)

설계는 특수한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미사여구로 치장된 수식어나 큰 의미 없는 개념적 술어들을 떼고 나면 설계는 결국 그림 그리기이다. 본질적으로 그림이라는 설계의 매체는 글과 다르다. 잘 써진 설계의 개념이 반드시 좋은 설계를 보장하지 않는다. 때로는 글이 설계를 방해하는 덫이 되기도 한다. 건축가는 언어의 사용 최대한 절제하고 시각적 매체로 생각을 표현하도록 훈련받는다. 그래서 나는 글로 설계를 표현해야 할 때 부딪히는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글로 쓰인 설계에 대한 평가가 전혀 무의미할 수도, 한낱 선입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글로 설계를 시작함에는 특별한 장점이 있다. 먼저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 그 생각을 언어가 강제하는 시간의 형식을 통해서 풀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반드시 타자를 전제하고 그 생각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 많은 이들은 설계를 그림으로 시작해서 그림으로 마친다. 흔히 말하는 선을 긋는 행위. 손에 배인 감각, 영감, 직관. 설계를 글의 형태로 한정함은 설계가에게 익숙해진 많은 것들을 배제해야 하는 낯섦을 의미한다.

낯섦을 의미한다. 그런데 청와대를 다시 설계하라는 요청은 반드시 이러한 낯섦을 필요로 했다. 우리가 이 기획을 통해서 끌어내고자 했던 최초의 가능성은 건축가로서의 조형적 감각, 미학적 감수성, 윤리적 소명에 있기보다는 건축을 매체로 한 건축 너머의 사유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유의 결과들이 제출되었다. 모두 합치면 75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었다. 한참을 읽다가 전부를 다 읽을 필요는 없지 않겠냐고 자문해보았다. 그런데 다 읽어 보아야 했다. 어설픈 책임감 때문은 아니었다. 설명회 날 나는 좌석의 절반도 차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바람이 거세었고 우산을 쓰고 있어도 만신창이가 되는 그런 날씨였다. 20대의 나라면 그런 설명회에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과는 달리 강의실의 좌석은 모두 찼었고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은 계단에 앉아있거나 뒤에 서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왜 그렇게 많은 학생이 굳이 오지 않아도 될 설명회에 와서 자리를 가득 채웠는지 모르겠다. 최소한 분명한 사실은 그 자리에 앉아있던 얼굴들이 20대의 나보다 빛나는 지나간 나의 자화상이었으며, 그렇지 못했던 지금의 내가 아마도 나보다 나을지도 모르는 이들의 생각을 읽지 않아도 될 권리 따위는 없다는 것이었다.

251개의 글 중에는 서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한 생각들도 있었고 그 어떠한 글과도 비슷한 데가 없는 특이한 생각들도 있었다. 많은 글에서 반복적으로 선택되는 장소가 있었다.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어오던 광화문 일대, 지금의 청와대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건축가들이 마음에 품은 마을의 개념과 잘 들어맞는 종로구의 동네들이 자주 언급되었다. 그에 못지않게 앞으로 용산 공원이 들어설 용산 미군기지도 인기가 좋은 대상지였다. 가장 압도적으로 많은 선택을 받은 건축설계의 방향은 기존의 도시나 마을 조직과 유사한 형태의 건물군으로 청와대를 조성하는 접근방식이었다. 이와 함께 많은 이들이 한국성, 혹은 전통적 공간의 재해석이라는 방식을 제시했다. 이는 우리 동네라는 주제와 연관이 되어있기도 했지만, 지금의 청와대가 보여주는 한국성에 대해 비판 의식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매우 독창적인 안들도 있었다. 화성에 청와대를 옮기자는 안이 제시되었는가 하면 전국 여러 곳에 청와대를 분산하자는 안도 있었다. 노숙자를 위한 청와대에서부터 한창 쟁점이 되고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제안도 있었다. 철도 위에서 이동하는 청와대, 지하화된 청와대, 통일 이후의 청와대, 한강 다리 위의 청와대, 세포막 구조를 닮은 청와대. 내가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청와대의 가능성이 다채로운 색의 불꽃놀이처럼 터져 나왔다.

안들의 유사성은 확실히 공모전에서 불리한 점이 있다. 많은 작품 중 소수만이 선정되는 공모전에서 유사한 안들은 주목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은 그 생각이 가장 튼튼한 공감대 위에 서 있으며, 어쩌면 가장 정답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특별함은 공모전에서 유리하게 작용한다. 일단 다른 안들과 다르기 때문에 관심을 끈다. 평범한 설계를 하는 건축가는 무능하며 남들과 다른 설계를 하는 건축가는 재능이 있다고 판단하는 암묵적이며 오래된 선입견도 여기에 일조를 한다. 그러나 특별함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쉽다. 모두를 공감하게 하면서도 내 생각을 차별화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많은 경우 특별함만을 위한 특별함을 추구하게 될 때가 많다. 가장 초보적이면서도 쉬운 차별화의 방식은 보편성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이 경우 잃게 되는 것이 너무 많다.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차별성은 아집에 가까운 일탈이 된다. 특히나 다수의 동의를 전제로 이루어진 권력을 위한 청와대라는 건물은, 그리고 모든 구성원이 공유할 수 있어야 하는 우리 동네라는 주제는 그런 일탈을 더더욱 허용하기 어렵게 만든다. 유사하다고 해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해서 좋은 것도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글은 아직 설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결국 최종적인 안의 가치는 글을 포함한 설계의 모든 강력한 매체들을 통해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글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그러나 가능성은 분명 앞으로 구현될 결과의 출발이기에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이미 설계에 대한 글을 쓰기 순간 그 설계는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글을 읽고 장소의 선택과 설계의 방식이 좋고 나쁨을 평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글을 통해서 분명 좋고 나쁨을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장소의 선택과 설계의 방향을 결정짓는 근거, 즉 설계를 위한 사유이다. 사유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사유의 방식이다. 많은 글이, 실상은 거의 대부분의 글이 촛불의 경험, 지난 권력의 잘못, 민주주의의 가치, 기존 청와대의 문제, 동네라는 개념적 대안을 설명하는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였고 자신의 설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는 지면의 낭비이다 이는 곧 사유의 낭비를 뜻한다. 왜냐하면, 주어진 질문에 대한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라는 주제로 어떻게 새로운 청와대를 만들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 동네라는 주제로 새로운 청와대를 만들고자 합니다.”라는 하나 마한 대답을 하는 셈이다. 도대체 왜 청와대를 다시 생각하라는 질문이 던져졌을까? 그리고 왜 우리 동네라는 말을 붙였을까? 사실 대부분이 자신의 사유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장황하게 늘어놓은 텍스트들은 질문 자체를 위한 이전의 사유의 결과였고 질문에 이미 그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전제들로 대부분의 글을 소진한 후에서야 정작 자신의 사유는 시작되었고, 시작되자마자 서둘러 끝나버렸다.

그렇지 않은 글이 있었다. “청와대를 우리 동네에 넣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얼핏 보면 그야말로 공모전의 주제와 동어반복처럼 보이는 이 제목의 글은 어쩌면 유일하게 주제와 동어반복이 아닌 글이었다. 우리 동네와 청와대라는 전혀 상관없다고 여겨졌던 두 공간을 병치시킨 공모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우리 동네도, 청와대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은 대상이 아니라 그사이의 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물론 이 글만이 청와대를 우리 동네에 넣고자 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제안은 우리 동네 같은 청와대를 만들려고 했고, 상당수는 청와대를 우리 동네에 넣고자 했다. 나는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인식과 사유의 태도 때문에 이 글이 좋았다. 수려한 문장은 아니었다. 이 글보다 훨씬 글재주가 뛰어난 글들은 많았다. 그렇게 치밀하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설익은 생각들은 얼마든지 반박할 여지 있었으며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그렇다고 설계의 제안이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제시된 공간적 대안은 과연 그것으로 충분할까하는 의문이 들게 하였다. 그런데 이 글은 군더더기 없이 곧장 문제의 본질을 건드리고 있다. ‘우리,’ ‘동네,’ ‘청와대’라는 공모전의 제목을 이루는 세 개념을 다시 사유한다. 그 사유의 끝에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면서 마무리한다. 일부러 많은 공백을 남겨놓은 과제의 의미를 차근차근 짚어 나아가며 그 공백에 자신의 사유를 채워 넣는다. 나는 이 글을 쓴 이가 설계까지 잘 풀어낼지는 모르겠다. 그것은 다른 영역이니까. 하지만 설계도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심사위원이라는 위치는 권력을 부여한다. 권력은 타인을 자신의 의사에 복종시키도록 인정받은 권리이다. 그 권리는 자의에 의해서이든, 타의 의해서이든 서로가 동의해야 효력을 얻는다. 건축을 통해 권력에 대해서 생각하라는 이 공모전에서 심사위원의 권리는 무엇인가? 나는 당신의 생각과, 노력과, 성과에 대해서 평가를 할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권리이다. 그러나 그 평가는 당신이 보여준 만큼에 대한 평가이다. 그마저도 나는 제대로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는 당신의 전부를 알지 못한다. 나에게 당신의 가치 그 자체를 평가할 권리는 없다. 자신의 가치를 타인이 함부로 결정하게 하지 마라. 그것은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고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만 타인의 견해는 나를 자아도취에서, 아집의 미몽에서 깨어나게 할 유일한 경종이다. 설령 베이는 듯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를 붉게 상기시키는 기분 좋은 상찬이 나에 대한 큰 오해라 할지라도 보다 괜찮은 나를 만들게 할 유일한 경종이다. 거기까지가 당신이 나의 권리에 대해서 동의해야 할 부분이다. 그래서 상처받을 일도 우쭐해 할 일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