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시암, 권건도, 장은수(국립공주대학교 건축학과)
과몰입에서 시작한 건축 이야기
이 작업의 시작은 일상의 아주 작은 장면이었다. 건축이라는 거대한 담론과 이미지 중심의 경쟁적 작업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돌아온 청파동에서, 나는 이름 없는 골목의 틈에 앉아 시간을 보내며 오래된 의자 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애착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의자가 사라졌을 때, 나는 그것이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내가 맺고 있던 소중한 ʻ관계’의 일부였음을 깨달았다. 골목을 다시 바라보자, 집 앞에 내어놓인 물건들은 방치된 물건이 아니라 각자의 삶이 담긴 생명력 있는 존재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애매한 공간에 작은 선반 하나를 내어놓았다. 며칠 뒤 그 선반은 사람들의 물건들로 가득 찼고, 이웃집 할아버지의 제작 요청과 함께 이 개인적인 실험은 ʻ공동체적 책임감’을 띤 건축적 제안으로 확장되었다.
청파동 애매모호 지도
청파동의 공간 구조를 Mapping, Scan, Measure의 방식으로 조사하며, 나는 개인의 행위가 어떻게 점유화를 거쳐 사유화로 발전하는지 그 흐름을 관찰했다.
청파동의 입면은 이처럼 시간과 필요가 겹겹이 덧씌워진 ʻPalimpsest’와 같다. 이 흔적들을 채집하여 블록 단위로 조합하고, 익숙한 손의 행위를 결합 원리로 삼아 새로운 건축적 대안을 도출했다.
아워 시리즈
첫번째 제안으로 ʻOur Facade’는 기존의 청파동의 파사드를 까뒤집어 점유의 경계를 흐리는 방식이다. 내 집 앞인지 우리 집 앞인지 모를 애매한 공간이다. 마을에서 소문이 퍼지고 이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만리시장 뒤편의 오래된 봉제공장을 ʻ플라스틱 방앗간’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은 마을의 폐플라스틱 자원을 수거하여 건축 부재로 재생산하는 운영 프로토콜의 거점이다. 카페, 쇼룸, 작업장이 연결된 이 플랫폼은 생산과 수리, 전시와 생활이 한 공간에서 교차하며 점진적으로 일어난다.
두번째 제안으로 ʻOur Balcony’는 점유화를 넘어 사유화에 대한 필요에 의해 생긴 수직·수평으로 증식하는 구조체이다. 한 세대의 확장이 다음 세대의 확장 조건이 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간섭은 이웃 간의 ʻ합의’를 이끌어낸다. 기생충 ʻ레우코클로디움’이 달팽이를 숙주로 삼아 자신을 드러내고, 새에게 포식되며 더 큰 스케일로 확산되듯, 아워 파사드와 발코니 역시 외벽에 기생하며 증식한다.
그리고 두 구조물이 서로 맞닿는 순간, 하나의 ʻ포티코’(Portico) 공간이 형성된다. 이 공간은 처음부터 계획된 질서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가 충돌하고 조율되는 과정 속에서 생성된다. 31개의 기둥이 만들어내는 느슨한 숲과 같은 구조 속에서, 사적인 확장은 비로소 공공의 장면과 연결된다.
합의를 통해 만들어 나가는 우리의 유산
이 프로젝트는 거창한 기념비적 유산을 남기려는 시도가 아니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조금씩 곁을 내어주며 합의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가는 ʻ과정’ 그 자체에 주목한 것이다. 나의 지극히 사적인 애착과 점유로 생긴 ʻ나의 유산’(My Legacy)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순간, 그것은 ʻ우리의 유산’(Our Legacy)이 된다. 과몰입에서 시작된 이 작은 리서치가 도시를 바꾸는 단초가 되길 바라며. 청파동을 넘어 또 다른 동네로 이어질 우리의 작업은, 삶이 건물의 경계를 넘어 밖으로 흘러나오는 따뜻한 풍경을 계속해서 만들어갈 것이다.




















박유진(숙명여자대학교 환경디자인학과), 이지훈, 이승헌(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우리는 ‘목욕’을 단순히 몸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경험으로 바라보았다. 목욕탕에서의 경험은 일정한 루틴으로 반복된다. 샤워를 하고 온탕과 열탕을 오가며 몸을 데우고, 사우나와 냉탕을 거쳐 다시 탕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단순한 행위를 넘어 일종의 의식처럼 작동한다. 그리고 목욕이 끝난 후 마시는 바나나우유까지, 이 일련의 흐름은 몸을 씻는 행위 이상의 만족감을 만들어낸다. 샤워가 개인의 위생을 위한 행위라면, 목욕은 타인과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며 형성되는 감각적 경험이다.
목욕탕에서는 탈의실에서 옷을 벗는 순간 사회적 역할이 해제된다. 직업이나 나이, 위치와 같은 외부의 기준은 옷과 함께 벗겨지고, 개인은 보다 평등한 상태로 전환된다. 탕과 사우나에서는 낯선 타인과 같은 온도를 공유하며 물리적, 심리적 경계가 흐려진다. 말없이 이어지는 사우나 속의 긴장감이나 더 오래 버티기 위한 암묵적인 경쟁, 그리고 때를 밀며 서로의 몸을 맡기는 순간은 개인을 넘어서는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경험은 목욕이 개인적인 행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라는 감각을 형성하는 장치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늘날 목욕탕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가정 내 위생시설의 보편화와 시간 효율, 프라이버시의 중시는 목욕탕의 필요를 감소시켰고, 그와 함께 공동체적 경험 또한 희미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목욕탕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목욕의 가치를 현대 도시 속에 새롭게 작동시키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이에 따라 목욕을 특정 건물에 한정된 기능이 아닌, 일상의 흐름 속에 스며드는 경험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대상지는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이다. 이곳은 현재 대규모 재개발을 통한 급격한 주거 재편이 일어나는 동시에, 오래된 다세대 주택단지의 흔적이 공존한다. 기존 거주민과 새로운 주민들의 혼재 속에서, 이문동은 일상의 관계를 이어줄 작은 인프라가 필요한 시점이다. 도시 속 반복적인 접점을 만들기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캠퍼스 내, 기존 주택단지, 그리고 외대앞역의 작은 광장 세 곳을 사이트로 선정하였다.
첫 번째 제안은 이문동 주거지 중심의 생활 거점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슈퍼마켓과 코인세탁소, 그리고 목욕탕이 결합된 공간에서 사람들은 장을 보거나 빨래를 맡기듯 자연스럽게 목욕을 경험하게 된다. 기존 목욕탕의 카운터는 단순한 출입 기능을 넘어, 일상과 목욕을 연결하는 매개로 확장된다. 사람들은 슈퍼마켓에서 결제를 하고 목욕탕으로 들어가며, 목욕 이후에는 도로와 맞닿은 평상에 앉아 쉬거나 주변 시설과 연결된 활동을 이어간다. 이는 기존의 생활 패턴 속에 목욕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방식을 제안한다.
두 번째 제안은 이문동 한국외국어대학교 내 목욕탕이다. 도서관과 강의실 사이에 위치한 이 공간은 학습과 휴식 사이의 중간 상태를 제공한다. 카페와 스터디 공간, 소규모 회의실과 결합된 목욕탕은 학생들이 공부 도중 잠시 몸과 사고를 이완시키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기존의 딱딱한 학습 공간과 달리, 목욕은 사고의 전환을 유도하고 보다 유연한 생활 리듬을 만들어낸다. 작은 단위로 나뉜 목욕 공간은 공유와 프라이버시 사이의 균형을 형성하며 다양한 사용 방식을 수용한다.
세 번째는 1호선 외대앞역 교통섬과 같은 도시의 잔여 공간에 제안하는 목욕의 경험이다. 빠르게 이동하는 사람들의 동선 속에 완만한 물의 흐름을 만들어, 잠시 발을 담그거나 머무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안한다. 이 공간은 단순히 통과되는 장소를 넘어 짧은 이완의 순간을 제공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각기 다른 속도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자신의 리듬에 맞게 머무르고 떠날 수 있는 상태를 만든다.
이처럼 본 프로젝트는 목욕을 특정 시설에 국한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도시와 일상 전반에 걸쳐 확장 가능한 관계적 장치로 재해석한다. 개인의 위생을 넘어 타인과의 공존을 경험하게 하는 목욕의 가치를 다양한 도시 맥락 속에 삽입함으로써, 점차 사라져가는 ‘우리’의 감각을 다시 회복하고 새로운 도시적 관계를 형성하고자 한다. 이는 단순한 공간 제안을 넘어 도시 속 관계를 재구성하는 하나의 전략이다.









이혜연(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개인들은 함께하고 함께 하기 때문에 무한한 엮임의 가능성을 가진다.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동료들과의 동행 속에서, ‘나’는 다양한 조합을 통해 수많은 가치-삶의 의미를 만들 수 있다. 근대화의 주된 방향에서 비켜선 채 잔존해 온 인현동 인쇄 골목에서, 우리는 조합이라는 방식의 유연성과 이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힘을 보았다.
더 많은 나를 향하여 열리는 인현동 인쇄골목
인현동은 1~2인 규모의 작은 인쇄 관련 업체 약 3500곳이 밀집한 동네이다. 인쇄물의 종류에 따라 각각의 업체가 매번 조합되어 하나의 인쇄물을 만들어내는 산업 구조는 긴급한 발주 요청에도 빠르고 유연한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진다. 그 결과 인현동은 조합형 인쇄업체 집적지로서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도심에 잔존해 있다. 그러나 인현동은 폐쇄적이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거래 관계를 전제로 작동하는 B2B 중심의 산업 구조 안에서, 한 번도 인현동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들어오지 못한다. 인현동의 강점이었던 다양성은 약해지고 있으며, 새로운 소재와 공정을 시도하며 인쇄의 범위를 확장하는 움직임이 커져야 할 시점이다. AI 등 기술의 발전으로 개인의 생산력은 높아졌지만 브랜딩에서 제품 제작까지의 실무 경험이 부족한 주체가 증가하고 있다. 이들이 바로 인현동 인쇄 골목과 조합될 수 있는 새로운 개인이다.
거 봐, 모이니까 할 수 있잖아
이 설계는 새로운 개인들이 인현동의 조합 구조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길의 폭과 필지 규모라는 두 척도에 따라 블록 내 건축물을 네 가지로 분류하고, 각 부지 특성에 맞는 설계 전략을 통해, 인현동이 새로운 개인과 새로운 조합을 맞이할 준비를 돕는다. 도로를 따라 리듬감 있게 늘어선 도로 작은 필지 연속형 건축물은 입면의 리듬감을 유지하며 2층으로 증축해 삼발이 운전기사님과 사장님, 방문객을 위한 창고 겸 쉼터와 화장실이 된다. 방대한 네트워크를 가진 기획사 사무소와 달리 좁은 네트워크를 가진 개별 공정 업체 사장님들의 접점을 만들어준다. 세 갈래의 길에서 인현동 인쇄 골목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환영하는 도로 큰 필지 후퇴형 건축물은 로비가 없는 인현동 전체 블록의 로비 역할을 한다. 어느 길에서 들어오든 인포 데스크로 향하도록 1·2층을 대수선하고, 뒤로는 회의실·자료실·세미나실을 배치했다. 6개의 방 중 4개가 공실이었던 골목 작은 필지 연접형 건축물은 벽의 절반만을 남겨 방에서 방으로 이동하며 각 인쇄 공정을 배울 수 있는 프린팅 라이브러리가 된다. 막다른 골목 끝의 골목 큰 필지 종점형 건축물은 세 건물의 맞닿은 벽을 철거해 5갈래 골목의 결절점이라는 새로운 접근성을 가진 기획사 사무소의 공간을 만들었고, 그 위 11층 규모의 레지던스가 얼굴 없던 건물의 새로운 간판이 된다.
우리를 지속하기 위해, 새로운 개인을 맞이하며 새롭게 조합됨을 반복하는 미래를 그려본다.









박진영, 구서진(세종대학교 건축학과)
‘침투하는 집’은 오늘날 서울의 주거가 안정된 정주의 기반이 아니라, 불안정한 삶을 임시로 지탱하는 구조가 되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 프로젝트는 그러한 현실을 사회적 진술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주거의 공간 조직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건축적으로 읽어낸다. 특히 혼자 살아가지만 완전히 고립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며, 세대 내부와 도시 사이에 놓인 현관 앞, 복도, 계단참, 건물 사이의 틈과 같은 중간 영역에서 새로운 주거의 가능성을 찾는다.
대상지인 가리봉동은 다양한 인구층이 공존하지만, 각자의 생활반경과 시간대가 분절되어 느슨한 병존 상태를 이루는 장소이다. 프로젝트는 이러한 분절을 부정하기보다, 그 안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미세한 접촉의 조건을 발견하고자 했다. 특히 가리봉동의 이른바 벌집형 주거는 좁은 대지 안에서 세대 수를 확보하기 위해 외부와 맞닿는 면을 늘리고, 공용 화장실과 복도, 계단 등 사이 공간을 독특하게 조직해 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형태 그 자체보다, 그 배치가 만들어내는 생활의 틈이다.
현장 조사에서는 덧대어진 구조물, 굴곡진 복도, 대문 앞 여백, 후면의 자투리 공간, 외벽을 따라 연결된 흔적 등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이 과정에서 프로젝트는 두 건물 사이의 틈이 단순한 잉여공간이 아니라, 이미 삶이 번져 나와 있는 장소임을 확인한다. 예를 들어 볕이 드는 면과 비어 있는 후면 사이에 빨랫줄이 연결된 장면은, 계획된 관계는 아니지만 생활의 필요가 이미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각 세대 앞에 놓인 생활 흔적, 바깥으로 밀려 나온 사소한 물건들, 머무름이 발생하는 계단참과 복도 모서리를 기록하며, 거주자들이 집 바깥에 어떻게 자신의 생활을 확장하고 있는지도 추적했다. 이러한 흔적은 무질서한 적치가 아니라, 각자의 리듬과 애착, 필요가 외부로 번져 나온 결과로 읽힌다.
이러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제안된 것이 ‘침투하는 집’이다. 이는 두 건물 사이에 새로운 덩어리를 삽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의 틈과 경계, 진입부와 공용동선을 다시 조직하여 집의 성질이 서서히 스며들게 하는 제안이다. 침투는 단순한 물리적 개입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대가 직접 결합하지 않더라도 상대의 인기척과 생활의 온도를 감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건축적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사적 공간을 해체하는 데 있지 않고, 사적 영역 바깥에 있으나 여전히 집의 일부로 작동하는 중간 영역을 두텁게 만드는 데 있다.
결국 ‘침투하는 집’은 공동체를 강요하는 제안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존재하는 삶의 흔적과 비공식적 사용을 세심하게 읽고, 그것이 지속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는 작업이다. 이 프로젝트는 건물 사이의 틈을 채우기보다, 그 틈 속에 이미 존재하던 삶의 가능성을 건축의 언어로 드러내고 재조직한다.





이한결, 정지우(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PATCHWORK는 건축에서 점차 소실된 ‘장식성’을 회복하고, 개인이 자신의 삶을 공간 속에 능동적으로 새겨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서 출발한다. 원시적 건축이 직조된 벽과 장식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과 달리, 현대 건축은 매끄럽고 균질한 표면을 제공하며 사용자로부터 공간을 만들어가는 감각을 점차 멀어지게 했다. 우리는 장식을 단순한 부가 요소가 아닌, 삶을 구성하는 적극적인 행위이자 공간을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확장해 ‘장식적인 삶’을 제안한다.
이러한 장식적 감각은 어린 시절의 비밀기지와 같은 자발적 공간 구성에서부터 시작된다. 성장 이후에도 우리는 학교 개인 책상, 방, 원룸, 더 나아가 도시 속 다양한 장소를 스스로의 방식으로 점유하고 해석하며 ‘나의 공간’을 만들어간다. 이처럼 개인의 취향과 선택이 축적된 장식적 파편들은 도시의 입면을 형성하며, 서로 다른 삶이 공존하는 패치워크와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서울 청량리 부흥주택은 처음 가지는 나의 공간으로 장식적인 삶을 회복하는 시작이 된다. 기존의 획일적 구조 위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증축과 변형을 반복하며 각자의 공간을 만들어온 장소로, 장식적 삶이 잘 드러난 곳으로 볼 수 있다. 일부 세대에서는 담벼락을 둘러 작은 마당을 만들거나, 계단 옆에 덧붙인 공간을 창고 또는 작업실로 사용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본 프로젝트는 공간의 경계를 물리적으로 구분하기보다 옅게 드러내 부흥주택 단지 내부에서 수많은 경계를 만들어온 ‘미장’에 주목한다. 미장은 개인의 취향과 흔적이 드러나는 장식적 경계로 밀도 높은 도시 환경 속에서 공간을 인식하는 중요한 장치로 작동해왔다.
설계는 최소한의 개인 공간(침대, 책상, 옷장, 위생시설)을 중심으로, 경계의 농도에 따라 확장된 개인 공간과 공유 공간을 단계적으로 구성한다. 기존 부흥주택의 다양한 계단들은 보존 및 재해석되어 1인 주거 유닛의 핵심 요소로 작동하며, 세대 간 관계를 매개하는 장치가 된다. 또한 계단 접근성이 낮은 영역은 공방, 카페, 세탁실 등의 공용 공간으로 전환되어 이웃 간의 교류를 촉진한다.
각 세대 앞의 공유 공간은 연결되어 회랑을 형성하고, 기존의 폐쇄적 골목은 보다 열린 폭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이는 단순한 이동 경로를 넘어 다양한 사건과 관계가 발생하는 장소로 전환된다. 몇몇 유닛들은 수직적으로 열린 공간으로 구성해 개인과 타인의 시선이 교차하는 새로운 공간 경험을 만들어낸다. 개인의 삶이 반영된 장식적 행위들이 다양한 스케일의 공간 속에서 축적되고 확장되며, 도시 전체를 구성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가구, 벤치, 플랫폼을 부흥주택 단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적색 벽돌로 디자인하여 도시 곳곳에 놓아 부흥주택 전체 부지를 하나로 연결하고 사람들의 여러 장식을 수놓을 수 있는 공간으로 제안한다.
작은 방에서 시작된 ‘나의 공간’은 회랑, 공유 공간, 공원으로 이어지며 점차 확장되고,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삶이 중첩되고 공존한다. 이는 획일적 공간이 아닌, 각자의 방식으로 꾸며지고 정의되는 도시를 제안하는 것이며, 장식적 삶이 지속될 수 있는 배경을 구축하는 시도이다.












김세헌, 문태희(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김린(고려대학교 건축사회환경공학부)
0.
뒤따라 나올 세 이야기는 세 사람의 ‘우리’에 대한 개인적인 관점에서 출발함을 밝힌다. A, B, C 각각에서의 화자는 비인간과의-적층된 기억으로의-유동적 경계로써의 차원에서, ‘나’라는 단어의 함의 속에 이미 ‘우리’가 내포함을 찾아낸다. 이러한 시선으로 새롭게 바뀐 세계를 인정한다면 결국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을까? 각 다리가 마치 문어처럼 더듬더듬 탐색해 나가는 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어떠한 세계를 마주하게 될까?
A. 문어가 되고 싶어요
본 글은 ‘문어가 되기 위해’ 더듬더듬 나아가는 나의 개인적 관찰일지이다. ‘나이며 우리’를 이미 이뤄낸 문어의 삶은, 신체에게 판단을 위임하는 이들의 분산 사고적 특성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조사의 결과보다도, 그 과정이 데려온 곳은 바로 ‘우리는 이미 문어’라는 지점이었다. 헤드폰 인공지능 세탁기 청소기 등… 오늘날의 도구는 내 ‘또 다른 다리’로 새롭게 자라났다. 집, 지하철, 무인카페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 모두가 문어로 변해버린 세상에선, 큰 광장보다 잘 만든 여러 무인 매장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B. 보이지 않는 뒤란*들
‘보이지 않는 뒤란들’은 저와 어머니의 대화록이자, 공동화된 기억이 공간을 매개하여 우리를 우리로 엮어줄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에요. 어머니가 직접 증축한 저희 집 복도 공간에서의 제 경험과 기억, 그리고 50년 전의 어린 어머니에게 심겨진 집 뒤란에서의 기억. 두 기억이 겹쳐지는 지점을 향해 대화와 몸짓, 스케치를 오가며 서로의 기억에 모양을 부여해갔어요. 어머니와의 대화가 마무리된 후에도 저의 질문은 확장되어 갔답니다. 지금, 도시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뒤란은 어떤 모습일까요?
* 집 뒤 울타리의 안
C. 우리 어떡해?
작업은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이미 함께 살아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도시는 타인과의 동시적 사용을 전제로 작동하며, 우리는 매일 서로의 간격을 조정하며 살아간다. 이 연구는 사람마다 편안한 거리가 다르지만, 반복적인 마주침이 쌓이면 낯선 사람과 공간도 점차 편하고 안전한 집과 같게 인식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를 바탕으로, 특정한 사람과의 친숙함이 그 사람이 점유하던 공간까지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설문과 심층 인터뷰를 통해 이를 조사했다. 연구 결과, 편안함은 고정된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관계의 축적과 익숙함의 형성 속에서 만들어지는 상태로 드러났다. 결국 ‘집’과 ‘편안함’을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타인과의 간격이 침범이 아닌 조화로 전환될 때 생성되는 공간이다.
1. 문어들이 사는 마을**
불안들이 나를 포위해 오던 때, 아스라이 점처럼 보이던 나의 집은 한순간 촉수처럼 뻗어 나와 도시 속으로 더듬더듬 흩어졌다. 그렇게 마주한 세상은 공과 사가 뒤바뀐 문어들의 세상. 사방에서 다가오던 불안과 염려는, 벼랑 끝에서야 우리에게 우리를 선물해 주었다. 그러한 결과로 물건들이 파도처럼 넘실넘실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우리는 도시 속에서 문어처럼 헤엄치듯 살게 되었다. 마치 처음부터 당연했던 것처럼. 우리가 나이고 내가 우리인 듯… 우리는 이 가상의 하루 속에서 마주친 풍경들을 기록했다.
지하상가 추락세는 무인점포의 비대화를 데려왔고, 사람들은 지하철에 하나둘씩 개인의 부엌을 가져왔다. 초단기 임대업의 극단을 달리던 카페 문화의 종착점은 ‘구축 아파트 같은 카페’였고… 어딘가 일그러진 일상성과 자기 인식을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내면에서부터 공동의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기묘한 세상 속에서 집의 부분을 계속해서 기억해 내고 생성해 냈다. 이들 간 경험-기억이 겹쳐지는 일상의 공통 공간이 모두의 뒤란으로 변한 것이다.
**옥토폴리스 (Octopolis) : 먹이와 은신처가 집중된 특정 해저 환경에서 의도하지 않게 밀집해 살게 된 문어들의 자연 관찰 사례이다. 옥토폴리스는 사회가 반드시 규칙이나 협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경 조건만으로도 ‘느슨한 공존’이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제목에 담긴 난망한 상황은 그동안 막연히 혹은 당연하게 생각해 온 ‘우리’라는 개념에 대한 재고를 필요로 한다. 동시에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세상과 무관한 내적 완결성을 목표로 개인적인 삶에 매몰되어 각자도생의 사회가 되어버린 지금, 나로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되는 사회적 연결고리나 그 접점을 상실해 버린 것은 아닐까 싶은 의심도 든다. 어쩌면 근본적으로 ‘나’에 대한 사고조차 완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나를 나로 만드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이번 작업은 스스로의 삶과 이야기를 돌보는 것에서 시작하길 권유한다. 무언가에 주의 깊다는 것이 돌봄의 시작이며 그 돌봄 없이는 애정이 생기지 않는다. 각자에 대한 애정의 시각으로 본인이 살고 싶은 삶의 방법과 형태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상상해 보자. 개인은 홀로 완결될 수 없으므로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부족한 능력에 대한 자각과 인지가 생기게 마련이며 자연스레 관심은 관계나 연대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은 결국 ‘누구와 관계를 맺으며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에 다름 아니다. 집이라는 장소를 개인에 한정하지 않고 조금 더 확장하면 길, 동네, 도시가 되듯이 돌봄을 개인에 한정하지 않고 서로에게로 범위를 확장하면 관계 혹은 연대가 되는 것이다. 개인의 정체성에 기반하여 각자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느슨한 연대(혹은 연결, 유대, 관계 등등)의 공간을 희망해 본다.
공간은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그리고 물리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관념적 빈자리를 칭한다. 반면 장소는 나를 둘러싼 환경에 관여하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획득한 일종의 터전을 말한다. 앙리 르페브르가 ‘공간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위와 사물, 환경이 어우러져 생산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생각한 공간은 장소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핵심은 ‘공간’이란 생활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며, 그에 대한 권리 또한 공간의 생산에 구체적이며 현실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제도적 형식화가 필요한 것이냐는 별개의 문제이며 충분한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합법과 제도 바깥에도 도시는 숨을 쉰다. 도시를 만들고 구성하는 행위에서 중요한 건 법안을 충족하느냐 아니냐 라기 보다는 사람들이 참여하여 만들고 싶어 하는 도시의 모습 그 자체라는 것이다.
불법에서 해법의 가능성을 찾은 토레 다비드의 거주자들, 무려 40km에 이르는 볼로냐의 포티코, 다가구(다세대) 주택의 계단실에 설치된 렉산 샷시 또는 방수를 위한 옥상의 경량 구조체와 골강판 겹지붕 같은 공간들은 법조문으로 성문화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무엇이 도시의 삶에 적절한지에 대한) 틈새의 감각을 절묘하게 보여주는 결과물들이다. 이러한 감각이야말로 삶의 터전을 공유하고 도시를 함께 만들어가는 근본적인 기초이다.
작고 사소한 건물(혹은 물건)이어도 그것이 도시에 놓이는 환경과 문맥, 그리고 역할에 따라 얼마든지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여기에서 건축(가)의 새로운 역할과 여러 가지 또 다른 가능성을 본다. 기발하고 번뜩이는 창조적 아이디어보다는 세심하고 주의 깊은 실천적인 제안이 필요한 시대이다.
- 심사위원 임태병(문도호제 대표)
퍼블릭아트(공공예술)를 나는 장소, 시간, 사물, 사람을 ‘예술’로 매개해 정동을 발생시키는 일련의 활동과 그 결과로 이해한다. 그 속에서 예술기획자로서 내가 해온 역할은 관객·사용자·수용자·경험자들이 다양한 감각적·신체적·정서적 공명(resonance)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경험 디자이너’에 가깝다. 예술에서 건축으로 개념을 옮겨 보면, 광의의 건축 속 ‘공유’, ‘공동’, ‘연대’와 같은 수식어가 붙는 활동 역시, 공간과 시간을 가로지르며 ‘건축’을 매개로 사용자·수용자·경험자들의 심리적·신체적·정서적 연결을 만들어내는 경험 디자인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동’과 ‘공공’, 그리고 ‘우리’라는 개념을 타자나 별개의 무리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험과 ‘남’의 경험이 대화와 리서치를 통해 교차하며 그 지점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러한 모호하고 모순적인 교차성을 즐거운 과제로 삼고, 내 경험과 생각의 조각들을 모아보는 연습, 그리고 도시 안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삶의 형태를 관찰하는 태도 역시 매우 중요하다.
‘우리 어떡해’라는 주제는,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가치와 체계가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의 삶 속에서, 표류하지 않도록 서로를 엮어주는 보이지 않는 ‘돌봄’의 건축적 가능성을 묻는 질문일지 모른다. 이는 땅속 균사체들이 나무의 뿌리를 따라 확장되며 우드 와이드 웹(wood-wide web)을 이루듯, 여러 층위에서 발생하는 ‘서로 돌봄’의 관계망이 우리 삶을 지탱할 물리적 구조를 상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돌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해 가족과 친구, 공동체로 확장되고, 더 나아가 동물과 식물, 그리고 우리의 삶의 근간인 땅까지 이어진다. 결국 우리는 거미줄처럼 얽힌 돌봄의 세계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집에서 키우는 식물을 돌보는 일이든, 공동 과제를 위해 잠시 꾸린 스터디 그룹이든, 길고양이의 물과 밥을 챙기는 동네 네트워크이든, 한 달에 한 번 줌으로 같은 책을 읽고 안부를 나누는 온라인 모임이든, 작은 텃밭을 함께 관리하는 공동 텃밭 모임이든 — 그 형태와 방식, 대상은 끝없이 다양하다.
보니 오라 셔크의 크로스로드 커뮤니티 – 더 팜(1974–1980)은 샌프란시스코의 고속도로 교각 아래 유휴지를 커뮤니티 가든으로 바꾸어, 주민들이 함께 가꾸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누릴 수 있게 했다. 베를린의 스튜디오 올라퍼 엘리아슨이 지속하고 있는 작업 키친(2005–)은 요리를 공동의 행위이자 감각적 경험으로 확장하여, 아티스트 겸 셰프 아사코 이와마와 베를린 인근의 여러 농장과의 협업을 통한 창의적 메뉴 개발, 구성원 간의 식사와 대화, 팝업 행사와 전시, 세미나 등을 진행한다. 이를 통해 예술을 매개로 기후 변화나 지속가능성 같은 사회적 의제를 사유하게 하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더 나아가 디지털 플랫폼 Local Dawgs는 금전적 거래 없이 주변 이웃 간 반려동물을 돌보며 신뢰 기반의 상호 돌봄 문화를 형성하는 시스템이다.
이처럼 도시 안에서 상상할 수 있는 돌봄의 형태와 방식, 대상은 무수히 다양하다. 그리고 그 다양성이 넓어질수록 우리가 경험하는 삶과 공동체 속에서 진정한 공명이 발생할 가능성 또한 커진다.
- 심사위원 홍보라(팩토리2 디렉터)
‘나는 어떤 모양으로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은 언뜻 즐거운 상상을 하게 하지만, 막상 건축가로서 이 질문을 대한다면 술술 대답하기 쉽지 않다. 우린 이 질문을 보통 첫 주택 설계를 하게 되었을 때 마주하게 된다. 조금 부끄럽더라도 대담하게 답하고 난 뒤, 점점 나의 삶보다는 내가 속한 사회를 위해 설계하게 되고, 건축가로 성숙해졌을 때는 타인을 위한 삶을 설계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정작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양을 잊고 살기도 한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장소, 문화, 기후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마을과 도시들이 비슷한 양태를 띄게 되고 수천 년간 이어온 다양한 삶의 모습은 잊혀졌다. 이번 기회에 ‘나는 어떤 모양으로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인간은 사회와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내 삶의 모양이 모여서 도시의 모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다양성의 가치가 커져가는 사회이지만, 과연 건축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는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는 개념이 주는 위화감을 마주하고, 가장 개인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도시로 나아가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볼 때다.
집은 사람의 삶과 시대의 모습을 그리는 존재이고, 집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평행하게 이어져 왔다. 우리가 그리는 집의 평면이 지금의 시대를 기록하는 기록물이 된다. 2025년의 시대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상상하는 미래, “인간의 상상력의 크기를 느끼게 하는 존재로서의 집,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건축으로 되어 있는 듯한 집”1)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함께 살 수 있을까?’
‘우리’라는 개념은 ‘나’라는 단일체의 복수형이다. 개개인의 단일체성이 사라진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라, 오히려 개별성이 확장되거나 증폭되는 복수화를 거쳐서 더 강화된 상태로 이해해야 한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양이 마을로 확장될 수도 있고, 나와 비슷한 삶의 모양들이 겹쳐있을 수도 있고, 혹은 오히려 서로 다른 모양들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우리가 될 때 급작스러운 일반화로 인한 중성화의 우를 범하지 말고, 개개인의 성격이 오히려 더 강화되어 새로운 우리의 형태, 나는 누구와 어떤 모양으로 살고 싶은가를 상상해보았으면 한다.
건축은 대지 안에서 완결될 수 있지만, 지어지는 순간 마을에 속하는 존재로서 마을의 일부가 된다. 거주환경은 건축뿐 아니라 그가 속한 거리와 마을 등의 환경 전체에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의 구조가 도시의 구조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서로의 구조를 드로잉해보고 이를 접속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단일체이면서도 집합체적인 성격을 가진, 집과 마을의 중간적인 존재로서의 건축은 어떤 모습일까?
‘건축이 도시를 만드는가’, ‘도시가 건축을 만드는가’라는 인과관계의 딜레마로부터 나와 우리의 상호 관계성을 강화하는 방법을 상상해 본다. 도시의 구조가 건축의 구조가 되고, 이로 인해 구축된 건축이 다시 도시의 일부가 되는 순환적이고 상호교환적인 풍경을 건축하는 것을 통해,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양이 우리가 살고 싶은 모양과 이어진다.
너와 내 삶의 모양들을 인류라는 보편적 관점 안에 적당히 섞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원하는 삶의 모양을 궁극적으로 반영한 건축을 생각해보고, 이 건축이 도시에 놓였을 때,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살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겠다.
“집이 개인적인 공간으로서 ‘나’를 확인하게 하는 곳이라면, 건축은 ‘우리’를 만들고 확인하는 곳이다.”2)
- 심사위원 이해든, 최재필(오헤제 건축 공동대표)
1) 류에 니시자와, 「家の建築」
2) 후지모리 데루노부, 「인문학으로 읽는 건축이야기」
“나는 오딘의 아들, 아스가르드의 왕자 토르다.”
“어데 최씹니꺼? 경주최씨 충렬공파 39대손, 현자 돌림!”
과거에 ‘나’를 ‘우리’로 뭉치는 접착제는 혈연·지연·학연이었다. 내가 선택할 수 없고, 한 번 정해지면 바꿀 수 없는 힘. 그렇게 가장 강력한 ‘우리’는 종친회·동창회·향우회였다. 하지만 가족·고향·동문의 점성이 옅어지면서, ‘우리’의 성격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이제는 개인이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취향 커뮤니티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달라진 오늘날 ‘우리’의 크기와 찰기는 어떻게 변하고 있을까?
전통적 커뮤니티는 클수록 강했기에, ‘찐득한 찰기’를 더해 덩어리를 불려가는 방식으로 성장했다. 반면, 취향 커뮤니티는 알갱이가 작은 ‘‘고슬고슬한’ 커뮤니티다. 취향이 세분화될수록 알갱이의 크기는 더 잘게 쪼개진다. ‘우리 어떡해’를 논하기 전에 각자의 ‘우리’를 감각해 보면 어떨까. 당신의 ‘우리’ 범위는 누구까지인가? 당신이 감각하는 ‘우리’의 적당한 점도는 얼만큼인가?
우리가 세계화의 반환점을 돌아 ‘부족화’로 되돌아간다는 가설을 세워보자. 돌아온 부족민은 부족을 선택하고 떠날 수 있는 자기주도적 선택권이 생겼다. 예전엔 부족에게 버려지면 살아남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부족을 떠나거나 새로운 부족에 들어가는 일이 한결 쉬워졌다. 이제 소속감을 자연수로 고정하지 않고, 소수로 분할하기도 한다. 월, 화, 수 디자인 업무는 수원에서(0.2), 목, 금의 목공방 일은 대전에서(0.5), 여름 한 달 트레일러닝 크루는 장수에서(0.3) 이어가는 식이다. 취향과 관심사의 변화에 따라 커뮤니티는 언제든 붙었다가 떨어지고 분할되거나 재편된다.
누구도 겪어보지 않은 미래 커뮤니티에 대한 여러분만의 가설도 궁금하다. 다만 상상 속 가설의 하중을 견디려면 든든한 리서치가 받쳐줘야 한다. 그 기단 위에 흥미로운 디자인이 올라서야 근거기반 디자인(Evidence-Based Design)으로 현실에 발을 디딜 수 있다.
고향이 아니라 취향을 중심으로 모이는 새로운 ‘우리’는 과거의 ‘우리’보다 훨씬 작고, 한층 가볍다. ‘우리’가 작고 가벼워지면 건축도 작고 가벼워진다. 건물의 크기는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총합과 같다. 고슬고슬한 우리는 피라미드를 원하지 않는다. 건물에 쏟는 돈은 가치관의 지속성과 비례한다. 이동성이 커진 부족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가볍고 산뜻한 건축을 원한다.
커뮤니티가 고슬고슬하고 띠부해질수록 큰 건물, 새 건물의 수요는 줄어든다. 더구나 인구는 줄고 빈집은 늘고 있다. 지방도시에서는 이미 짓지 않는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성장도시 시대에서는 가장 먼저 성장하는 서울이 논의를 주도했다면, 축소도시 시대에는 가장 먼저 축소하는 중소도시가 논의를 주도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지방도시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나? 세계에서 가장 빠른 축소를 경험하고 있는 글로벌 선두주자 지방도시들은 “우리 어떡해?”하며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작고 가벼워진 건축은 의도적으로 힘을 뺀 적정 건축을 향해 간다. 최근의 프리츠커상 흐름이 말해주듯, 크기와 화려함은 건축에서 더 이상 최우선순위가 아니다. 적정건축은 스트리밍 시대의 음악과 닮아 있다. LP를 사고 정성껏 판을 닦아 음악을 듣던 시대에서, 일상의 일부로 음악이 스며드는 스트리밍 시대로 넘어왔다. 일상 곳곳에서 음악과 동행하자니, 내지르는 고음과 진한 소몰이 창법은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다. 대신 속삭이듯 잔잔하고 힘을 뺀 가창이 선호된다.
건축에서도 화려한 조형의 월드투어 콘서트 같은 건축과 더불어, 일상 곳곳에서 만나는 잔잔하고 힘을 뺀 건축도 필요하다. 건축의 대상도 지금까지 건축가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상가, 인테리어, 리노베이션, 가로, 소공원, 스트리트 퍼니처(street furniture) 혹은 설계를 넘어 시공, 브랜딩, 공간운영까지 확장될 수 있다. 이는 건축이 사람들의 일상에 몇 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다.
렘 콜하스의 S, M, L, XL에 포함되지 않았던 XS 건축은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환경에 부하를 주는 화려한 건축이 아니라, 회수 가능한 초기 투자비용 안에서 실현할 수 있는 저예산 적정건축의 새로운 지도는 어떻게 그려질까?
“우리 어떡해?”라는 묵직한 질문에 폼나는 비전을 제시하기 전에, 막상 우리 건축가들은 앞으로 어떡해야 하나를 고민해야 하는 건 아닐까? ‘우리’의 의미가 바뀌고 ‘짓지 않는 시대’가 도래하는 지금, 건축가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나? 삶의 방식과 커뮤니티가 변하는 만큼 건축가의 역할 또한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세상을 리드하며 해답을 내려주는 영웅적 건축가보다, 일상과 고락을 함께하는 다정한 ‘동네 건축가’가 필요한 시대다.
“건축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건축가를 포기했다”고 말한 도쿄 R부동산의 하야시 아쓰미 대표, 『건축하지 않는 건축가』를 쓴 마츠무라 준 박사는 건축가를 포기하지도 건축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근대 이후 고정된 ‘건축’, ‘건축가’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확장시킬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건축가들, ‘우린’ 어떡해야 할까?
- 심사위원 윤주선(충남대학교 교수)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몇 곳의 설계사무소와 인테리어 사무실, 그리고 SAAI건축의 공동 대표를 거쳐 2016년 독립했다. 현재 문도호제 대표로 건축가이자 기획자이며 운영자다. 문도호제는 짓기와 만들기를 넘어 조율하기(기획, 운영, 관리)까지를 건축가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싶어 하는 사무소로 이를 위해 일반적인 건축설계사무소의 시스템이 아닌 인테리어, 시공, 그래픽, F&B, 부동산 운영 등을 담당하는 각각의 팀과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B-hind, D’avant을 비롯한 홍대 지역의 몇몇 카페를 직접 디자인, 운영했고, 이천 SKMS 연구소, 메종 키티버니포니, A.P.C. 홍대, KWANI 플래그십 스토어, 라이브러리 티티섬, 리브랩 등의 건축 작업이 있다. 건국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를 거쳐 지금은 PaTI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2022 Korea House Vision의 기획위원이기도 했다. 해방촌 해방구, 풍년빌라, 여인숙, 신촌 문화관, 이미집, 현관방의 집 등 몇 개의 작업을 통해 ‘중간주거’라는 가볍고 유연한 새로운 주거 관련 작업을 진행 중이다.
팩토리2 디렉터, 예술기획자. 경복궁 서쪽에서 작은 뾰족한 예술 공간이자 기획 사무소인 팩토리2를 운영하며, 도시·사람·예술의 역동적 관계를 기반으로 국내외 다양한 퍼블릭 아트와 프로젝트를 기획해 왔다. 장르 간 경계를 선이 아닌 넓은 지대로 확장하고자 연구·기획·제작·교육 등 예술과 문화 전반에서 경계 없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에서 예술행정을 전공하고, 시카고시 문화부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퍼블릭 아트 분야에서는 평창문화올림픽 공공미술 프로젝트 Signal Light. Connected, 창덕궁 후원 내 비밀의 소리, 함양 상림숲에서의 라운드프로젝트 등의 아트디렉터를 맡았다. 전시 기획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디자인 기획전 <미각의 미감>, 헬싱키디자인미술관 <Wirkkala Revisited>, 문화역서울284 디자인 특별기획전 <인생사용법>, 한국국제교류재단 북유럽디자인 특별전 <노르딕데이> 등을 기획했다. 또, 21회 밀라노트리엔날레 한국관 예술감독으로 <Making is Thinking is Making>을 기획했다.
단국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건축사사무소 사무소효자동을 거쳐, 동경예술대학 미술연구과 건축전공 석사과정을 이누이 쿠미코 연구실, 톰 헤네간 연구실에서 수료했다. 2016년 동경예술대학 재학 중 「오헤제 건축」을 설립하여, 2017년부터 서울에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주요수상력은 신건축 국제주택설계경기 2007 2등, 동경예술대학 요시다 이소야 수료제작상, 도쿄건축컬렉션 요코미조 마코토상, 일본 SD Review 2017 입선 - 목천의 「세 집」 등이 있다.
건축의 업역을 확장하는 동네 건축가. 건축·도시의 재생과 건축가 개념의 재구축에 관심이 있다. 연구자로서는 ‘보는 연구’가 아닌 ‘해보는 연구’를 지향한다. 2018년부터 ‘잇는 건축가’를 다루는 건축외계(建築外界) 세미나를, 2019년부터 ‘짓는 건축가’를 다루는 DIT(Do It Together) 워크숍을 기획해왔다. 현재 충남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행동하는 도시건축 집단 ‘우당탕탕 Lab’을 이끌고 있다. 동네의 창의적 메이커, 공간 운영자를 존중하고 그들과의 협업을 통해 크고 작은 도시 공간환경의 개선을 추구한다. 공(公)·민(民) ·학(学)연계형 지역관리회사, 택티컬 어바니즘, DIT마을재생, PPP 공공건축 재생, Walkable City, Placemaking 등의 분야에서 ‘설레는 선례’를 만들어가고 있다. 대표적인 현장 연구로 군산 영화타운 재생 초기 기획, 군산회관 PPP형 재생 기획, DIT 공간 재생 시리즈, 대전 동네 건축가 프로젝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