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정림학생건축상은 ‘지금, 한국성’을 묻습니다. 케케묵은 것처럼 보이는 ‘한국성’을 ‘지금’과 만나게 하기 위해서는 한국 현대 건축의 흐름을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지난 세기 한국성은 한국 건축의 성배였습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고 국민국가를 형성해나가던 1960년대 이래, 정부청사, 미술관과 박물관, 극장과 공연장, 체육관과 박람회장 등 국가를 상징하는 모든 건축물은 한국성을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식민지배와 전쟁 이후, 타자와 다른(무엇보다 일본과 다른) 한국이라는 고유한 정체성을 획득하는 일은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이 과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건축가들은 먼저 전통 건축의 형태를 콘크리트로 번안하거나 추상화하는 시도를 펼쳤습니다. 재래의 건축 형태를 현대의 재료로 표현하는 것은 전 세계에 걸쳐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전통과 현대의 타협은 쉽지 않았습니다. 콘크리트로 기와지붕을 올리라는 국가의 줄기찬 요구와 동시대 현대 건축으로 도약하고 싶었던 건축가들의 욕망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콘크리트로 만든 전통 건축의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 대두된 것이 외부공간입니다. 한국 건축의 정수는 건물 자체라기보다는 그 건물들의 군집이 빚어내는 외부공간에 있다는 이 아이디어는 한국성 논의의 물꼬를 틀었습니다. 이 흐름은 당, 마당, 비움, 보이드 등으로 변주되며 이어져 내려옵니다.
구체적인 형태 또는 추상적인 공간에서 한국성을 찾는 이 두 경향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전자는 역사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불리고, 후자는 모더니즘을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으로 파악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 둘의 공통점도 분명합니다. 서구의 것과 다를 뿐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과도 구분되는 한국성의 정수는 근대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여기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세기 한국성은 탈출구 없는 일종의 정언명령이자 윤리였습니다.
정림학생건축상 2022는 한국성을 둘러싼 이런 통념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지금, 한국성’이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함께 탐구하고 싶은 한국성은 단일한 기원을 갖거나 본질적인 형태로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성은 미리 존재하는 하나가 아니라 매번 다르게 구성될 수 있는 여럿입니다. 따라서 오래된 과거의 것에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만들어내는 한국성에 더 주목합니다.
이훈우나 박길룡, 누구를 시작점으로 삼더라도 이제 한국 현대 건축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닙니다. 현대의 유산이라고 해도 좋을, 20세기 건축가들이 생산한 수많은 건축물이 2021년 한국성을 이야기하는 데에 새로운 참조점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한옥에서 생활한 경험이 거의 없는 아파트키드들이 중견 건축가가 되었고,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수많은 건축가 없는 건물들이 지어진 지금, 한국적인 것을 찾는 다른 출발점이 필요합니다. 다세대 다가구 주택에서 도시의 컨텍스트를 찾고, 불법과 합법을 오가는 증·개축에서 형태의 모티프를 발견하고, 한옥과 현대 건축을 구분하지 않는 젊은 건축가들의 작업에서 이미 이런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성”은 한국성이란 되풀이되는 물음에 답하는 ‘지금’의 자리에 주목합니다. 전통 건축과 서구 건축 이론 모두 직접 주어져 있지 않은 세대, 그러나 동시에 둘 다 자신의 자산으로 삼을 수 있는 새로운 세대에게 한국성은 어떤 것인지, 또 한국성을 도구로 삼아 무엇을 만들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보려 합니다.
- 심사위원 박정현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조차도 사치로 여겨질 만큼 급속한 근대화가 이루어진 이 땅에서 한국적 모더니즘을 서양의 관점 아래 논하는 것은 결국 건축가들만의 신세 한탄으로 남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제는 그런 잣대를 떠나 우리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매일 마주하는 주변부터 면밀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닭 먹방’을 보고 ‘범 내려온다’를 듣는 2021년 지금, 과거의 무거운 짐을 벗고 일상과 현실로부터 논의를 출발하는 것이 새로운 한국성에 관한 이야기를 생산적이고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도시는 극히 파편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며, 혼성교배적이고, 아이러니합니다. 가히 미셸 푸코가 언급했던 '들뢰즈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자본주의의 성공과 폐혜를 동시에 드러냄으로써 증명하고 있습니다.[1] 콜드플레이의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지는 서울은 그 어느 도시보다도 히스테릭하고 힙합니다. 오히려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서울은 놀라울 정도로 다른 패러다임을 가진 도시이며 기존의 도시 패러다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놀랍고도 매력적인 도시인 것입니다. 이러한 서브 컬처로서의 면모는 한국성 담론에서 공공연히 외면받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을 잘 활용하지 못합니다. 특히 서양에서 체계화된 학문인 건축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한국성을 치켜세우거나 한국 도시의 불합리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다만, 한국인의 근간을 이루는 정신적 토대와 그 물리적 결정체로서의 도시, 그리고 우리 주변 건물들이 이 둘과 맺는 인과관계를 추적해볼 필요는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우리가 이어갈 건축 작업에서 ‘지금’의 한국성이 어떻게 건축적 어휘로 포함될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함입니다.
우리 도시는 온갖 키치와 초현실성으로 가득합니다. 거대한 산을 지우고 들어선 무거운 콘크리트 덩어리인 아파트 단지는 가짜 초록 물질로 다시 둘러 싸이고, ‘◯◯캐슬’, ‘◯◯지움’ 같이 꿈과 이상이 압축된 얇디 얇은 이름들로 포장됩니다. 차창 밖으로 불현듯 나타나는 중세 유럽의 성을 닮은 건물은 프로방스풍 예식을 치루는 결혼식장이며, 동네에서 심심찮게 마주치는 고딕풍의 교회들은 이미 장소성을 떠난 대중적 키치의 산물입니다.[2] 모텔 창문에, 다세대 주택 현관에, 공항 식당가 불고깃집에, 대학 건물에도 정체불명의 양식들이 차용됩니다. 극도로 혼재된 이런 콜라주적 건축들은 콘텍스트라는 윤리성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이기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매우 복합적인 정신 구조의 산물입니다. 관계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회에서 극한의 경쟁을 해야 하는 모순된 삶이 만들어낸 조울증적 표피이자, 우리에게는 당연했던, 자본주의의 적나라한 실체일 것입니다. 혼돈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극단적 실용주의와 가성비, ‘대충대충’과 온정주의, 적당한 절충과 대인배정신, 윤리에의 강박을 우리는 매일 일상 속에서 마주합니다. 이런 태도와 정신을 외면한 채 한국성을 고상한 것들 속에서만 찾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3]
‘시를 위한 시’를 비판했던 시인 김수영은 낙후한 현실에서의 시적 진보는 “뒤떨어지지 않은 것 같은 시를 위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낙후성을 확고하고 여유 있게 의식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4]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온몸으로 부둥켜 안으면서도 보다 나은 현실을 지향하는 낙천적 풍자를 통해 긍정적 탈주를 한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도시와 건축은 온통 질타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저 시인처럼 우리 도시와 건축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기울이고 공감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정림학생건축상 2022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보듬고 껴안는 과정이며 우리가 시시하게 여겼던 것들, 숨기려고 했던 것들이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건축적 실험이자 유희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이번 정림학생건축상의 프로그램은 윤리성, 공공성과는 의도적인 거리를 두고자 합니다. 빌라 사보아와 바나 벤추리 하우스가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방점을 찍었던 것처럼 작고 사적이지만 시대의 미학을 역설적으로 가장 잘 응축해서 보여줄 수 있는 단독주택을 설계의 대상으로 합니다. 1993년 강남에 들어선 수졸당이 그 시대 한국성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한다면,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22년 우리 시대의 ‘수졸당’은 무엇일지 다시 묻습니다.
- 심사위원 서재원
[1]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그들의 일련의 책에서 현대사회를 편집증에 대비되는 분열증적 자본주의로 규정하면서 중심을 부정하고, 차이, 다양체 등의 가능성을 긍정하였다.
[2] 피터 W.페레토, 정은주, 조순익 역, 『플레이스/서울』, 프로파간다, 2015, 298~337쪽.
[3] 현대 한국인이 처한 복합적 상황을 잘 드러낸 짬짜면과 반반치킨은 한국인의 오랜 염원이 이뤄낸 ‘적당한 절충’의 산물이다.
[4] 김영준, 『시인 김수영 전집2』, 민음사, 2018,576쪽. 김상환,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 민음사, 2000, 50~56쪽.
한국성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누구는 ‘제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라며 눈을 부라렸고, 누구는 ‘이제 지겨우니 제발 그만’이라며 눈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실체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에 지치면서도 남의 것을 계속 좇고 있는 찜찜함이 남아 있습니다. 모두 알다시피 한국은 어느 시점에 외부의 힘에 의해 그동안의 삶의 방식과 문화가 단절되고, 새로운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이후의 한국성 논의가 단절되었던 것을 소환하는 쪽이나 거부하는 쪽이나 둘 다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던 것은 시대의 상황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금 다시 한국성을 논하는 것은 갑자기 어떤 실체가 나타나서가 아니라, 이제는 다른 태도로 우리를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과거와 단절을 통해 새로움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적 흐름과 잃었던 것을 다시 복권시켜 이어가야 한다는 공동체적 사명이 한동안 대치했습니다. 건축 분야에서는 모더니즘 대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불리던 싸움이 오랜 세월 지속되는 동안 새로웠던 것들이 더 이상 새롭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고, 민족과 지역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신 우리에게는 더 많은 문화의 파편과 시간의 켜가 쌓였습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서로 다른 문화와 양식이 우리를 만들어 왔고, 지금의 우리 모습을 표현해주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과거 한국성 논의가 집단의 대표성을 규명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배제해가면서 남과 다른 본질적 속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면, 이제는 어떤 우위를 판단하지 않은 채로 여러 특수성과 가능성 속에서 지금의 한국성을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금의 우리에 대한 단호한 긍정입니다. 절대적 기준에서의 맞고 틀림이 아니라 지나온 과정에 대한 이해와 지금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우리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의 태도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의 시선들이 필요합니다. 집단적 시선은 공동체의 가치를 위해 배타적이 되고 한 방향으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새로운 한국성 논의의 목적은 집단의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함보다 지금의 우리와 관계하는 것을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긍정적 태도와 개인적 시선을 통해 지금의 우리에게서 발견된 것들이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 줄 것입니다.
이번 정림학생건축상의 계획 대상은 단독주택입니다. 한국성을 단독주택이나 주거공간에서 찾자는 말이아닙니다. 개인적 시선과 그것의 건축적 표현에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주택은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공간이며 개인의 일상과 가장 맞닿아있는 건축이므로 여러분이 발견한 한국성의 단서들이 사회적, 윤리적인 잣대에서 비켜나서 개인적인 내용과 방식으로 건축으로 연결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모인 집들이 ‘지금, 한국성’을 말해주기를 기대합니다.
- 심사위원 김효영
단국대학교와 경기건축전문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여러 젊은 건축가의 아틀리에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김효영 건축사사무소를 개소했다. 건축이 만들어지는 상황에 감정을 이입하여 어떤 성격을 찾아내고 표현하며, 이를 통해 생겨나는 질문으로 지금의 우리를 건축과 묶어내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영주시, 서울시, 행정중심복합도시의 공공건축가로 활동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주요 작업으로 울산 바닷가 벽 집, 자람터 어린이집, 점촌 기와올린 집, 문경 복터진집과 공모전 당선 후 시공 중인 동해 무릉3지구 폐쇄석장 리모델링과 인제 스마트복합쉼터 리모델링 등이 있다.
단국대학교와 경기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현재 에이오에이 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 대표다. 현대 사회의 다면적 상황을 ‘비판적 수용’의 관점 아래 애증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부조화와 조화, 합리성과 비합리성, 풍자와 농담 등의 모순적 병치를 통해 한국 사회의 동시대성을 담고자 노력하고 있다. 주요 작업으로 음성 디귿집, 성산동 고양이집, 제주 쌓은집, 홍은동 남녀하우스, 망원동 단단집, 서교 근생 등이 있으며, 2017년 젊은 건축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겸임교수와 서울시 공공건축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을 비롯해 『김정철과 정림건축』(편저),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이하 공저), 『중산층 시대의 디자인 문화: 1989~1997』 등을 쓰고,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 『건축의 고전적 언어』 등을 번역했다. 2018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Out of the Ordinary》(2015, 런던), 《Contemporary Korean Architecture, Cosmopolitan Look 1989~2019》(2019, 부다페스트) 등의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마티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며 건축 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알라딘 저자 소개)